과수원의 추억
이 경화
과수원집 아이는 사과가 밥이다
사과나무 위에 동그마니 앉아 사과를 먹는다
볼 붉은 아이 얼굴을 살짝 깨물어 주듯이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지만
볼 붉은 사과위에 내려앉으면 이내 빨개지고 만다
나뭇잎도 수런수런 바람에 나부긴다
아이는 한 마리 작은 짐승처럼
나무 등걸에 딱 붙어 있다
어느덧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시장바닥에서 사과상자를 본다
볼이 붉은 사과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 같다
강가에 앉으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세월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은 강물이다
강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흐르는 세월이 드러나 보인다
내유년시절
금호강은 우리의 놀이터
오빠와 함께 물고기 떼를 몰며
놀던 시절이 그립다
얕은 물결위론 구름이 떠있고
그 물결과 더불어 흘러가는 모습은
늘 쓸쓸했다
강바닥으로 저녁노을 가라앉고
어둠이 사방으로 드리워질 때서야
우리들은 강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강물은 무심히
흘러가버린 세월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세월은 유유히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
무희(舞姬)
아침마다 눈을 뜨면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권태
어제의 생채기들이 피로를 떨치지 못한 채
오늘이란 바다로 나를 또 밀어낸다.
온몸의 땀샘에서 흘러나와 솟구치는
열정이 성난 파도가 되어
가야금의 선율을 타다가
다시금 소용돌이친다.
휘황찬란한 무대 위에 선
네 말없는 몸부림의 언어가
비 오듯 쏟아지는 박수 갈채 속에서
잠시나마 섬광처럼 떠오르지만
이내 어둠속으로 사라져간다
심사평
이경화 씨의 10편 응모작들은 수준이 고르고
오랜 습작을 통해 탄생시킨 열정의 알맹이들이라고 판단된다.
이중에서 <강물에 앉으면>,<과수원 추억>,<무희> 등 세편을
신인상 당선작으로 최종 결정한다.
시는 사고의 연결이 시간적 인과적 질서를 따르기 보다는 연상의 질서를 따르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다면,
하나는 인공적 생산물이며 다른 하나는 예술적 창조물이라 할 수 있는데,
모두가 새로이 만들어지지만
‘구두’는 생산된다고 하고 ‘무용’은 창조된다고 한다.
구두는 가죽으로 그대로 남지만
무용은 걷는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보법이 변형되거나 파괴되어
독특한 기능을 발휘한다.
이처럼 시적 자아란 결국 언어의 일상적 가치를 변형시키거나 파괴하여
새로운 언어질서를 빚는 창조적 작업에 참여하는 과정인 것이다.
먼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중요한 원리가 은율과 은유임을 알 수 있다.
산문에 비해 리듬은 한 편의 시를 지배하며 문장구조보다는
시행의 길이에 의해 창조된다.
시의 운율을 둘로 나누면 외형률과 자유율이 있는데,
작품 <강물에 앉으면>은, 외형상 리듬이 없는 것 같지만
속살로 흐르는 시인 특유의 맥박과 호흡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시어에서 흘러가는 강문, 떠가는 구름, 흐름의 이미지가 청음으로 들린다.
이것이 곧 자유시에서 필요로 하는 자유율인 것이다.
시어의 맑은 음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청각적으로 들리고,
원관념인 세월을 강물에, 구름에 비유하며 지난날을 회상에 젖어들게 하며
흘러가는 강물, 강변의 놀이터, 물고기 떼가 마치 독자와 함께 있어
눈으로 보는 것처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은유의 차용이 시적 감동을 준다 하겠다.
지난날의 시가 리듬을 중시하고 그 음악성을 높이 평가한 반면, 현대시는 이미지를 중시하며 그 회화성이나 고도한 표현 기교를 내세운다.
시는 상상력의 세계다.
상상력이란 이성적 사고와 비교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작품 <과수원 추억>에서 보는 것처럼 사과가 밥이 되고 붉은 아이 볼이 되며,
드디어 시작 자판에서는 붉은 사과가 지난날의 어린 시절의 화자가 되는데
그 상상력이 풍부하다.
시를 포함하여 모든 예술을 사물을 이성적으로 잘게 분석하기 보다는 상상력에 의해 종합한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화자의 참회의 정신이 스미어 있어 더욱 발전을 위해 정진하리라는 시인의 결심이 보인다.
릴케는 “시는 인생의 체험이다.”라고 말했듯이
시란 자신의 체험과 참회에서 생산되는 언어 예술이다.
작품 <무희>는 한없는 고통의 순간을 겪는 무용가의 길에서 인생의 가치는 땀과 눈물의 결정체라는 것을 체득한 화자가 한 송이 꽃이 만개하기까지 비바람을 맞아야 된다는 것을 체험한 예인이다.
환호성을 듣고 난 후의 허무를 토로하고 연주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쓸쓸함과 고독을 극복하여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는 예술인의 길을 걸으며
인내의 과정을 겪듯이 시인으로 등단 후에도 더 정진하여 중단 없는 좋은 작품을 쓰리라 기대한다.
시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주 잊어버리는 사물들의 모습과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게 해준다.
살아가는 동안 세상과 자연을 보는 밝은 눈을 조금씩 읽고
모든 것을 눈앞의 효용과 값으로 따지는 삶 속에 얽매인 이들에게
세상의 여러 사물과 일들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주는
훌륭한 시인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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